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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신촌족발보쌈, 마늘족발

용자8072 2026. 3. 29. 09:41

마늘의 냄새는 언제나 먼저 온다.

문을 열기도 전에, 자리에 앉기도 전에, 메뉴판을 펼치기도 전에. 경북 안동의 신촌족발보쌈의 마늘족발 앞에 앉았을 때도 그랬다. 접시가 테이블에 내려앉는 순간 마늘 향이 공기를 장악했다. 족발이 아니라 마늘 요리가 나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는 마늘을 좋아한다. 아마도 한국인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단군신화에서 웅녀가 마늘과 쑥만 먹고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민족의 마늘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후에 삽입된 서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끔 한다. 그 정도로 한국인과 마늘의 관계는 깊고 오래되었다.

그런데 족발에서 마늘을 이렇게까지 전면에 내세울 수 있는가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마늘이다. 분명히 족발인데 마늘이다. 씹히는 질감은 족발의 그것이었다. 콜라겐이 녹아든 부드러운 살, 탄력 있는 껍질, 약간의 지방. 그러나 혀가 먼저 감지하는 것은 마늘의 알싸함이었다. 육향, 즉 고기 자체의 향은 마늘 뒤에 가려져 있었다. 있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주인공이 아니었다.

족발의 육향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족발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족(足)은 발이라는 뜻이다.

한자로 발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족발은 발-발, 즉 발이 두 개라는 뜻이 된다.

 

언어학적으로 꽤 흥미로운 중복이다. 영어로 치면 "footleg" 혹은 "legfoot" 정도의 이상한 조합이 될 것이다. 한국어의 한자 혼용 과정에서 생긴 이런 이중어(二重語) 현상은 생각보다 흔하다. 역전앞, 처갓집, 고목나무 같은 단어들처럼. 말이란 논리보다 먼저 입에 달라붙는 것이고, 족발이라는 발음은 어딘가 힘차고 투박하게 혀에 착 붙는다.

족발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홍소육(紅燒肉) 계열 요리와 만나게 된다. 간장과 향신료로 오랜 시간 조리는 방식은 동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다. 중국에서는 홍사오주티(红烧猪蹄)라고 부르는데, 간장, 설탕, 팔각, 계피를 넣고 천천히 졸여낸다. 한국의 족발도 이 조리법의 변형이다. 간장 베이스에 다양한 향신료를 넣고 삶아낸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 족발은 중국 버전보다 간장의 비중이 낮고, 대신 청주와 생강으로 잡냄새를 잡는다. 같은 재료, 같은 방식, 그러나 완전히 다른 결과물. 음식이 국경을 넘을 때 일어나는 변형은 언제나 그 사회의 맛 감각을 반영한다.

그 족발 위에 마늘을 올리는 것은 어떤 발상에서 나왔을까.

960년대 서울에 족발 골목이 형성될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마늘족발은 없었다. 족발 위에 마늘을 도포하는 방식은 비교적 최근의 변형이다. 마늘의 항균 효과, 마늘이 주는 강렬한 향미의 호소력, 그리고 어쩌면 조금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현대 소비자의 입맛이 결합된 결과물일 것이다. 자극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음식도 그 흐름을 따른다.

문제는 마늘이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는 점이다.

좋은 족발의 조건을 생각해본다. 콜라겐이 충분히 녹아서 끈적한 식감을 만들어내는 것. 살과 껍질의 비율이 적절한 것. 그리고 고기 자체의 향, 즉 육향이 간장과 향신료와 조화를 이루는 것. 신촌족발보쌈의 마늘족발은 앞의 두 조건은 만족한다. 살은 부드럽고 껍질의 탄력도 적당하다. 그러나 육향이 마늘에 눌려 있다. 마치 조용한 목소리가 큰 북소리 뒤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마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족발은 꽤 매력적일 수 있다. 마늘의 알싸함을 좋아하고, 그 향이 입안 가득 퍼지는 경험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실제로 그런 손님들이 있을 것이다. 식탁 위의 선호는 다양하고, 마늘족발을 특별히 찾아오는 사람들이 이 집의 단골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마늘의 압도가 결점이 아니라 이 집을 다시 찾는 이유가 된다.

나는 한 점, 또 한 점을 먹으면서 계속 마늘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상추에 족발 한 점을 올리고 쌈장을 조금 얹어 먹으면 마늘 향이 조금 희석된다. 새우젓에 찍어 먹으면 새우젓의 짠맛이 마늘과 충돌하면서 또 다른 맛의 층을 만들어낸다. 곁들여 나온 반찬들 깍두기, 고추, 된장, 쌈 채소 은 이 마늘 폭풍을 조금씩 완화하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혼자서는 너무 강한 무언가를 주변의 것들이 받쳐주는 구조. 음식도 결국 관계다.

안동이라는 도시는 경북의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전통과 보수의 이미지가 강하다. 하회마을, 도산서원, 안동 간고등어, 안동 찜닭. 그런데 그 안동의 한 골목에 마늘족발을 전면에 내세운 집이 있다. 전통의 도시에서의 파격. 혹은 파격처럼 보이지만 사실 마늘의 사용은 한국 음식의 가장 오래된 전통 중 하나라는 역설. 단군신화의 웅녀를 다시 떠올린다.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 안동에서 마늘족발을 먹는 것이 어딘가 신화적인 구도로 겹쳐진다.

족발이라는 음식이 처음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60년대 서울 마장동 일대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도축장 인근에서 버려지던 돼지 발을 간장으로 조려 팔기 시작한 것이 족발의 시초라는 이야기다. 가난한 시절의 음식. 버려지던 것을 아껴 먹던 시절의 지혜. 그 족발이 지금은 배달 앱에서 한 집에 3만원, 4만원을 호가하는 음식이 되었다.

음식의 신분 상승은 언제나 흥미롭다. 족발만이 아니다. 곱창, 순대, 선지국밥, 뼈다귀해장국. 한때 가난의 음식이라 불리던 것들이 이제 도심 식당에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음식이 신분 상승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 음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인가. 아마도 음식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마늘족발 한 접시를 거의 다 먹어갈 무렵 나는 마늘에 익숙해져 있었다. 처음의 충격이 사라지고 나니 족발 본연의 맛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늘이 입안을 가득 채우다 보면 역설적으로 그 뒤에 숨어 있던 고기의 질감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온다. 마치 시끄러운 음악이 갑자기 멈추면 방 안의 정적이 더 깊게 느껴지는 것처럼. 소음이 사라지면 비로소 들리는 것들이 있다. 마늘이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비로소 보이는 족발이 있다.

신촌족발보쌈의 마늘족발은 마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이 접시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마늘이 압도한다는 것은 결점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이 집은 마늘족발이라는 장르를 선택했고, 그 장르 안에서 충실하게 구현했다. 모든 음식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고, 모든 누군가는 자신만의 이유로 특정한 맛을 선택한다.

다만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족발 위의 마늘을 덜어내면 그 아래에 숨어 있는 고기의 향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마늘이 없는 그 족발을 언젠가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마늘을 걷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족발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큰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에서 진짜 음악이 들리듯이.